술을 과하게 먹고 나서 크리스마스 이브와 당일날 집구석에서 뒹굴뒹굴한 것에 대한 보복인지 며칠 내내 퉁퉁 부어서 말도 안하던 마누라가 한마디 한다.


"내일 오전에 캐시가서 배추사고, 놀다가 저녁에 남파가자~"


"남파?"


Boise 에서 약 30분을 가야되는 Nampa 시에 왜 가고 싶냐고 반문하려다가 순간 생각이 들었다.


Nampa에는 City buffet라는 중국 부페가 있다. 이 동네 여러군데 미국식 부페를 가봤지만 먹을 게 마땅찮은데, City buffet는 아무래도 동양식 음식이 많아서 그런지 먹을게 꽤 있다. 애들도 좋아하고...


부페 가자는 소리군....


사실 좀 더 가까운 곳에도 City buffet가 있긴 한데, Nampa의 City buffet가 먹을 게 좀 더 풍부하다..


......


저녁에 부페에 가서 실컷 먹고서는 부른 배를 부여잡고 옆에 있는 Winco로 갔다. 우유와 먹거리를 몇 개 사고, 너무나 부른 배 때문에 불쾌한 심정으로 운전을 하며 집으로 오고 있는데..


"엄마 크리스마스 노래 틀어줘요~"


뒷 자리에 앉아 있던 큰 아들놈이 노래를 틀어달란다.


"이제 크리스마스 지나서 크리스마스 노래가 안 나올건데~"


하며 라디오를 틀었는데, 예상대로 들어보지 못한 팝만 흘러나왔다.


11월 말 땡스기빙 데이가 지나자마자 바로 크리스마스 모드로 돌입하여 한달내내 캐롤송만 들리던 라디오에서 언제 그랬냐는듯이 캐롤송이 딱 끊겼다.


유투브나 틀어주라며, 내 핸드폰을 마누라한테 넘겨주니 크리스마스 노래 모음이 있는 영상을 찾아 틀어준다.


......


Chestnut, jingle bells 등등 노래가 흘러나오자 두 아들놈들이 신나게 따라부른다.


난 영어는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든데,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애들을 보자니.. 미국 와서 돈질하고 있는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미서부 IDAHO의 BOISE라는 동네에 온지 근 2년여가 다 되어 가는데.. 이제 영어 몇 마디 한다고 위안을 삼고 있으니 원...


......


미국에서 눌러살지, 한국으로 돌아갈지 아직 이렇다 할 계획이 선 게 아니지만, 만약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한국 학교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 놈들이 어떤 식으로 적응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그러다 문득 내가 국민학교 2학년때 전학온 한 친구가 떠오른다.


80년대 초중반... 서울에서 따지면 부산보다도 더 시간이 걸리는 교통오지인 울진.


코찔찔흘리는 촌놈들이 대부분인 학교에 가끔 도회지 냄새가 나는 애들이 전학을 왔다가 가곤 했다. 당시에는 그런 애들이 전학을 오고 가는 이유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여느때나 마찬가지로 전학온 얼굴이 허여멀건 한 아이.


프랑스에서 살다 왔다는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고, 마침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그 친구의 자리가 배정되었다.


요즘처럼 집단 따돌림이라는 개념도 생기기전인 그때라, 다들 새로온 친구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갔지만, 그 친구는 뭔가가 이상했다.


이상했다기보다는 한국 말이 어눌했다.  프랑스에서 오래 살다가 와서인지 한국말이 서툴렀던 것이다.


국민학교 2학년때 나는 상당히 똑똑했다.


받아쓰기 10문제를 만점 받기 일쑤여서, 매번 빨간색연필을 상으로 받았고, 더하기 빼기를 틀리는 친구들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똑똑했다. ㅎㅎㅎ


그런 내가 보기에 이 친구는 많이 어리버리했다. 그리고 여러가지 과목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친구였기에 우리들은 딱히 그 친구와 잘 어울려 놀지를 못했다. 


지금이야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또 내 기억이 뭔가 왜곡되어 있을 수 있지만 한가지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툭하면 선생님이 그 친구를 앞으로 불러세워 노래를 부르게 했다.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외국이 뭔지도 모르는 촌놈들에게 프랑스에서 살다왔다는 그 친구는 외계인급의 인사였다.


그래서 뭔가 분위기가 침체될 때면, 선생님은 그 친구를 불러서 프랑스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샹송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율동과 함께 혀꼬부라진 노래를 부르는 그 친구에게 우리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


그런데 그건 사실 환호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그건 놀림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과 반 아이들 모두 한 통속이 되어 그 친구를 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의 기억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으로는 분명 우리들은 그 친구를 놀리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런 날들이 지나가던 어느날,


부모님들의 학력 조사를 하게 되었다.


나의 부모님들은 학교 근처에도 못가본 분들이었지만, 매번 학교에 써낸 건 "국민학교 졸" 이었다. 


아버지도 본인이 못 배운 사람이란건 알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환경탓이었다는 것도 알지만 웬지 못 배움에 부끄러움이 있었던 탓일까.... 부모님은 늘 학력을 "국민학교 졸"이라고 써내곤 했다.


보통은 새학년이 되어서 학교에 신상정보를 써내는데, 그 날은 수업중에 거수로 학력 조사를 하였다.


"부모님이 학교 못 다닌 사람?"


선생님의 물음에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나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난 안다. 여기 있는 친구들의 대부분의 부모들이 나의 부모와 같다는 걸...


"국민학교 나온 사람?"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온다. 대부분이 이 질문에 손을 들었으리라..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한 부모님이 있는 친구도 한 두명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그리고..


"부모님이 대학교 나온 사람?"


전학 온 그 친구가 손을 든다.


여기저기서 오오오 하고 함성이 들린다.


사실 그 당시는 중학교, 고등학교는 알아도 대학교라는게 뭔지도 몰랐다. 그냥 뭔가 대단해 보였다.


뭐 이제 조사가 끝났나 생각했던 그 때, 또 질문이 나왔다.


"대학원 나온 사람?"


전학온 그 친구가 또 손을 든다. 그리고 손을 든 또 다른 친구. 그 역시 몇달 전에 전학온 친구다.


대학원이 뭐야? 대학교 보다 높은거야? 뭐야?


대학원이 뭔지 알길 없는 촌놈들은 그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웅성웅성 할 뿐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가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는 다시 전학가게 되었다. 그리고 몇달 전 전학온 친구도 비슷한 시기에 전학을 가게 되었다.


......


프랑스에서 전학온 얼굴 허옇던 그 친구. 김준현? 김중현??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 안난다...


......


지금쯤... 어딘가에서 공부잘하는 박사가 되어 있지나 않을까 생각이 든다.


......


나중에 커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친구 같은 외국에서 온 아이들이 울진에 자주 들락날락 하던 건 원자력 발전소 때문이었다.


당시 코펙(KOPEC)이라는 원자력 발전소 사택에서 살았고, 프랑스에서 대학원 다닌 아빠. 빼도박도 없이 그냥 프랑스에서 학위 받은 원자력공학 박사의 아들인 것이었다.


울진 원자력발전소 입장에서야 그런 인재들이 필요하니 늘 영입을 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울진을 떠나고 싶어했다. 교육, 의료가 정말 최악이었으니까..


아마 울진에서 몇 달이나 몇년을 근무하고 나서는 본사로 올라갔겠지...


그 부모를 따라, 전학을 왔다갔다 하던 외국서 살다온 아이들...


......


우리 촌놈들은 그런 아이들의 진짜 정체도 알지 못한 채, 단지 한국말이 어눌하다는 이유로 바보라 생각을 했으니....  


......


............


지금에 와서 그 친구를 떠올리는 건 그 친구에게 미안하다던가 사과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어쩌면 그런 부모를 둔 행운아였으니, 지금은 누구보다도 잘 살고 있겠지...


......


다만, 난 내 아이들이 한국에 들어갔을 때, 한국 학교에 적응 못해서 어리버리하다고 놀림을 받을까 그게 걱정인 것이다.


뭐 그래도 ... 우리 애들은 한국말은 잘 하니까... ㅎㅎㅎ


......



배가 너무 불러서....  뜬금없이 한 줄 글을 써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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